최신영화

진실보다 공포에 반응하는 구조를 비판적으로 위펀스

천당옆분당 2025. 11. 13. 17:59

 

영화 위펀스(Weapons, 2025)는 단순히 공포를 유발하는 장르 영화가 아니라, 현대 사회가 품고 있는 불안과 죄책감, 그리고 ‘상실’이라는 감정의 본질을 탐구하는 작품이다. 감독 잭 크레거(Zach Cregger)는 전작 「바바리안」을 통해 인물의 공포와 사회 구조적 모순을 교묘히 엮어내며 주목받은 바 있다. 이번 작품에서도 그는 비슷한 방식으로, 공동체 내부에서 벌어지는 ‘집단 실종’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통해 현대인의 불안과 도덕적 마비를 강렬하게 그려낸다.

영화의 배경은 미국의 평범한 교외 지역이다. 집들이 나란히 늘어선 조용한 마을, 평범한 부모와 아이들, 그리고 이웃 간의 일상적인 대화가 이어지는 전형적인 중산층 사회. 하지만 바로 그 평범함이 영화가 내세우는 공포의 출발점이다. 어느 날 밤, 초등학교 3학년 학생 17명이 같은 시간에 동시에 사라진다. 단 한 명의 아이만이 다음 날 등교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단순한 설정 하나로 영화는 곧바로 사회의 균열을 보여준다. 안전과 평온을 믿던 세계가 하루아침에 뒤집히는 순간, 사람들은 서로를 의심하고, 책임을 떠넘기며, 도덕적 공황 상태에 빠진다.

시대적 배경을 보면, 영화는 명확히 2020년대 미국의 불안정한 정서를 반영한다. 코로나 팬데믹, 총기 사고, 미디어의 과잉 보도 등으로 인해 미국 사회는 ‘공동체의 신뢰’가 무너진 상태에 놓여 있었다. 감독은 이런 현실적 배경을 빌려 “두려움이 어떻게 사회적 해체를 부르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영화 속 부모들은 실종된 아이들을 찾기보다, SNS와 뉴스 속 가짜 정보에 휘둘리고, 서로를 비난하는 데 더 몰두한다. 결국 사건의 본질보다는, ‘누가 더 무책임한가’를 겨루는 싸움으로 변질된다. 이 모습은 현대 사회가 진실보다 공포에 반응하는 구조를 비판적으로 보여준다.

줄거리의 중심에는 세 명의 주요 인물이 있다. 교사 저스틴, 경찰 폴, 그리고 실종된 아이의 아버지 아처. 저스틴은 마지막까지 남은 아이를 보호하려 하지만, 그 역시 내면에 죄책감을 안고 있다. 그는 “내가 조금만 더 주의했다면, 아이들이 사라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시달린다. 폴은 술에 의존하는 무기력한 경찰로, 사건의 진실을 찾으려 하지만 점점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진다. 아처는 아들을 잃은 슬픔 속에서 이성을 잃어가며, 무언가를 믿어야만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다. 세 인물 모두 다른 위치에서 상실을 겪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무기력하고 불완전한 어른의 초상을 보여준다.

영화는 이들의 시선을 따라가며 사건의 실체를 서서히 드러낸다. 그러나 ‘실종된 아이들’의 행방은 끝내 명확히 밝혀지지 않는다. 대신 감독은 관객이 그 불확실한 상황 자체를 받아들이게 만든다. 즉, 위펀스는 ‘무엇이 일어났는가’보다 ‘왜 아무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는가’를 묻는다. 아이들이 사라졌다는 설정은 단순한 공포 요소가 아니라, 세대 단절과 도덕적 붕괴를 상징한다. 아이들은 미래를 상징하지만, 그들이 사라졌을 때 어른들은 오히려 서로를 향해 무기를 들이민다. 영화 제목인 ‘Weapons(무기들)’은 바로 그런 의미다. 그것은 총이나 칼 같은 물리적 무기가 아니라, 인간이 타인을 공격할 때 사용하는 의심, 분노, 무관심 같은 감정의 상징이기도 하다.

작품의 연출 방식은 매우 독특하다. 장르적으로는 호러의 형식을 빌렸지만, 내용은 심리극에 가깝다. 어둡고 차분한 색감, 정적인 카메라 워크, 그리고 불협화음처럼 들리는 사운드는 관객의 불안을 극대화한다. 특히 사건의 원인을 끝내 설명하지 않는 결말은, “답이 없는 현실의 공포”를 강조한다. 일부 관객들은 “이해하기 어렵다”거나 “결말이 불친절하다”고 평가하지만, 바로 그 불친절함이 이 영화의 핵심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영화가 다루는 공포는 괴물이나 귀신이 아니라, ‘설명되지 않는 상실’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관점에서 보면, 위펀스는 현대인의 감정 구조를 거울처럼 비춘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불안을 느끼고, 그 불안을 덜기 위해 누군가를 탓하거나, 정보를 소비하거나, 감정적으로 폭발한다. 감독은 그런 인간의 본능을 잔혹하게 드러내며, “우리가 진짜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특히, 아이들이 사라진 뒤에도 세상은 계속 돌아가고, 사람들은 여전히 밥을 먹고, 웃고, 분노한다는 점에서, 영화는 인간의 냉정한 본성을 고발한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는 ‘무력감’이다. 부모, 교사, 경찰, 언론 등 누구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심지어 신의 개입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무기력한 세계관은 현대사회의 ‘불신’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신뢰할 수 있는 제도, 보호받는 공동체, 정의로운 권력이 모두 사라진 사회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점점 더 공격적으로 변한다. 영화 속 인물들이 서로를 향해 던지는 거친 언행과 폭력은 바로 그 ‘불신의 무기화’를 상징한다.

결말부에서 감독은 명확한 해결 대신, 한 줄의 대사와 함께 침묵을 남긴다. “우리는 다시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 이 말은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상실 속에서도 버텨야 하는 인간의 현실을 의미한다. 그 순간 관객은 깨닫는다. 이 영화의 공포는 괴물이나 유령이 아니라,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총평하자면, 위펀스는 호러 장르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안에는 현대 사회에 대한 철학적 질문이 자리한다. “공포란 무엇인가?”, “우리는 왜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서로를 공격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이 영화 전반을 지배한다. 현실의 불안과 감정적 폭력이 뒤섞인 세상 속에서, 감독은 관객에게 ‘이성의 무기’ 대신 ‘이해의 무기’를 선택하라고 말하는 듯하다.

결국 「위펀스」는 무섭다기보다 불편하고, 서늘하며, 진실하다. 공포는 스크린 속에 머무르지 않고, 극장을 나온 관객의 마음속에서 계속 살아남는다. 그것이 바로 이 영화가 던지는 가장 잔인하면서도 현실적인 메시지다.